하찮은 글

자대에서 만난 세가지 우연

빱조 2020. 12. 3. 20:22

자대에 막 배치를 받아 전입을 온 신병은 왠지 모르게 긴장하게 되기 마련이다. 아는 사람도 없고, 새로운 환경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나는 이제 자대에 배치 받은지 3주가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내가 마주한 사랑스러운 우연 세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연 하나

임무 분담제. 군대에서는 대게, 주어진 구역을 돌아가며, 매일 청소한다. 내가 자대에 와서 처음 한달간 맡게 된 청소 구역은, 다목적실. 주로, 라면 등의 냄새가 나는 취식물을 먹으며 휴식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하지만, 이 다목적실이 내게 기쁜 우연으로 다가온 이유는, 다목적실의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책들.

전입 대기기간(2주)이라는 제약에, 혼자서 도서관에 방문하기 쉽지 않은 나에게는 정말 보물섬이었다. 반가운 책, (읽어볼까 했지만) 지나쳤던 책, 처음 보는 책들이 가득가득했다. 입대할 때 가져갈까 고민했던 책들이 있던게 너무나 신기했다.

매일 다목적실을 청소할 때, 책 정리도 하면서 내 구미에 당기는 책들을 뽑아, 생활관에서, 그리고 연등시간에 죽 읽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의 첫 청소 장소가 다목적실이었던 것은 정말이지 신기하다.

상실의 시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3일간의 행복,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지대넓얕,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을 읽었다. 아직도 발견할 책이 한참 남아있는듯하다.


우연 둘

신병 K의 전입. 내가 전입 오고 바로 다음 날, 두 명의 신병이 같은 생활관으로 전입오게 되었다. 그 중, 내 옆자리를 쓰게 된 K.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계발에 대한 욕심. 그는 정말 대단했다. 매일 일과 후 저녁을 먹고, 체력단련실로 뛰어가 그의 운동 루틴을 시작한다. 그리고, 불침번 초번이 아닌 이상, 매일 연등시간에, 그의 공부를 했다.

사람은 주변 사람에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다. 특히나 군대처럼 밀접하게 살아가는 공간에서는. 그에게서 받을 수 있는 좋은 영향은 다 받기로 마음먹은 나는, 그를 따라 체력단련실에서 그의 루틴을 함께 했으며, 그가 계란 등으로 단백질을 보충할 때 같이 먹었고, 연등 시간을 같이 보내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을 매일 가졌다.


우연 셋

이 우연은 아직 마주하지 못했다만, 이윽고 확정적으로 마주하게 될, 정해진 우연이다. 나는 5일에 한 번 정도 상황병 근무를 서게 될 것이다.

상황병 근무란, 아침 8시 30분부터 다음 날 아침 8시 30분까지 말 그대로 식사시간을 제외한, 24시간 동안 지휘통제실이라는 곳에서 지박령으로 있으며,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것이다.

그 24시간 중 분명히 한가한 시간대가 있다. 그 시간에, 의지만 있다면, 어차피 자지도 못하는 시간을, 굵직굵직하게 나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공부를 해도 되고, 글을 써도 되고, 생각을 해도 되고, 책을 읽어도 된다.

그리고 다음날 근무 취침이라고,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낮잠을 잘 수 있다. 이미 충분히 잤으니 그날 밤은 2시간 연등이 가능해진다.


이 커다란 세 가지 우연 외에도 짜잘짜잘한 우연들이 많은데,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나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우연론자를 자처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연을 주제로 하는 글을 더 올릴 날이 오면 좋겠다. 내가 올리게 될 글의 성분은 우연적으로 생성될테지만, 내가 쓴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계획과 실행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