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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10. 19:41
지금 내가 매트릭스에 누워
멍 때리는 건
풀린 눈 뜬 채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야
데카르트도 천장에 앉은 파리를 보며
좌표계를 떠올렸다고
나는 잠수하는 중이야
몸에 힘 빼고 가라앉는 중이야
수면 위를 둥둥,
유유자적 헤엄칠 그 날을 망상하며
심연의 바다는 끝도 없이 깊구나
이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발이 닿지 않아 무서워,
얕은 수면으로 옮겨왔어
유스풀에 둥둥 떠다니며
요 근래 똑같은 생각만 했지
아무튼
천장을 멍하니 올려보는데
천장과 내 머릿속간에도
만유인력이 작용하나봐
생각의 파도가 몰아치더라
저 둥근 전등이 달이고
내 머리통이 지구일까
생각이 어떻게 생각나는가에 대한 생각,
그러니까 뇌의 작용과, 무의식의 저변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익사할뻔했어
엄청나게 충격적인 경험이었지
바다는 이렇게나 커다란데
유스풀에 갇혀 살았구나
그 반복되는 낮은 파도로
돌고 돌아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면서도
희희덕대고, 익숙해져서 안락을 느끼며
즐겁다는 듯 살아왔네
앞으로는 바다에서 놀자
다시 한번 파도를 일으키는 거야
다음에는 지진해일을 경보할게

2020. 12. 6. 19:17
81.
피시방의 비좁은 화장실에는 ‘나’와 J, 둘밖에 없다. ‘나’는 화장실 문을 잠근다. 사람의 인기척에 J는 잠시 ‘나’를 돌아보지만 이내 신경을 쓰지 않고 참아왔던 오줌보를 갈기려고 바지춤을 급하게 추스른다. 그 순간 ‘나’는 J에게 달려들어 그의 옆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82.
묵직한 한 방이었다. 연이어 ‘나’는 그의 얼굴과 화장실 벽 사이의 좁은 틈으로 주먹을 꺾어 넣어 그의 인중을 노린다. J가 내 쪽으로 고개를 트는 바람에 주먹은 그의 반대쪽 턱에 비껴 맞는다. J가 ‘나’를 제대로 돌아봤다. 눈과 눈이 3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마주쳤다. J가 고래고래 소리치려고 입을 벌린다. 그때 냅다 어퍼컷. 턱의 반동에 혀를 콱 씹은 J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곰이 뿔났다.
83.
J는 ‘나’를 강하게 밀쳤다. ‘나’는 뒤로 날라가 화장실 벽에 몸을 부딪친다. 곧바로 X가 그의 육중한 몸을 ‘나’에게 날린다. ‘나’는 피하려는 움직임이었지만 J의 몸은 너무나도 비대했다. 머리와 척추 그리고 꼬리뼈에 걸쳐 순식간에 아찔한 고통이 번진다. 어째서인지 ‘내’가 받는 충격이 나에게도 전달됐다.
84.
‘나’는 J에게 꼼짝없이 깔렸다. J는 ‘나’를 제압한 상태로 ‘나’를 엉덩이로 깔아뭉개며 내 위를 점한다. 그는 우악스러운 손바닥으로 내 뺨을 갈겼다. “되겠냐?”, “아니 도대체 왜 까불지?” 등의 말을 뱉으며 계속해서 ‘나’의 뺨따귀를 후려댄다. ‘나’는 열심히 버둥대지만, 그의 마운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정신이 혼미하다. 무기력하다. 그의 체중이 나의 흉부를 심하게 죄어온다. 숨이 막혀오는 한편, 이 와중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그 녀석의 정체.
85.
쌍둥이 인격
그 녀석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었다. 원래부터 내 몸에 같이 있었다. 쌍둥이 인격. 태어날 때부터 한 몸에 두 명분의 인격이 들어가는 것.
86.
태초에 우리는 성향이 비슷했다. 우리가 둘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우리가 어렸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 녀석과 나와의 소통은 일절 없었고 사실 소통은 필요도 없었다. 우리의 생각은 거의 일치했다. 아마 몸의 주도권은 나보다 조금 더 기가 센 그 녀석에게 있었던 것 같다.
87.
다섯 살
어린이 집에서 ‘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한 아이가 빼앗아가 다툼을 벌였다. 어쩌다가 그 아이의 얼굴에 옅은 손톱자국을 남겼다. ‘나’는 어린이집 선생한테 배를 강하게 걷어차였다. 그 녀석은 실제로 기절한 듯했고, 나는 곰을 만나면 죽은 척하라는 잘 알려진 이야기를 떠올리며 기절한 척했다. 부모에게 전화가 갔고 우리는 빈혈로 쓰러진 것 같다고 통보됐다. 그 녀석은 기가 죽어 한참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몸의 주도권을 획득한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88.
초등학교 2학년
한 깝죽대는 녀석의 코피를 터트렸다. 지금껏 내가 우발적으로 그런 줄로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린이집 선생의 폭력으로 자리를 잃은 그 녀석이 조용히 폭력성을 키워가다가 불쑥 튀어나와, 묵혀 놓은 폭력성을 펑 하고 터트린 것이다. 그 녀석은 곧바로 다시 들어갔고, 혼이 나는 것은 내 몫이었다.
89.
초등학교 5학년
수련회에서 만난 다른 초등학교와 시비가 붙었다. ‘나’와 친구들은 수련회가 끝난 다음 주에 그 초등학교에 찾아가 패싸움을 벌였다. 패 싸움 도중 그 초등학교의 직속 중학교 선배들이 나타나 ‘나’는 머리를 엄청 얻어 맞았다. 사실 이 날의 일은 내 기억 속에 없다. 친구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 녀석 멋대로 폭주하다가 얻어맞은 이날이 그 녀석의 마지막. 그는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그 녀석은 폭력 때문에 그의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90.
그 녀석은 부활했고, 내가 정신적으로 흔들릴 때 다시 찾아왔다.
91.
나의 위기가 곧 그 녀석에게는 기회. 그는 내 몸의 지배를, 아니 ‘우리’의 몸의 주도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것인가. 그의 증명을 위해, 폭력의 행사를 위해.
92.
다시 화장실. 이윽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뭐야, 기절했냐? 싱거운 새끼.”
X는 기절한 ‘나’를 내버려 두고 다시 소변기로 간다. 나도 내가 기절한 줄 알았다. 하지만 기절한 건 ‘나’였다. 나는 깨어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곰을 만났을 때 죽은 척하면 산다는 메시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93.
X는 참아왔던 오줌을 시원하게 갈기며 혼잣말을 지껄인다.
“목요일도 그렇고 정신 나갔냐? 얄팍한 새끼가.”
갑자기 얄팍하다는 단어에 울컥한 나는 ‘나’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오줌을 누는 X의 뒤에서...
94.
이단 날라 옆차기. J의 등허리에 두 방 꽂으려 했는데 도움 딛기 과정에서 바닥의 물기에 살짝 미끄러졌다. 결국 그의 오금에 옆차기가 꽂혔다. 바닥의 물기는 나에게만 미끄러운 게 아니었다. J가 팔을 허우적대며 뒤로 엎어진다. 엎어져서 바둥댄다. 그의 오줌발은 한참 동안 끊기지 않는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구찌 청바지와 하얀, 발렌시아가 후드에 물이 든다. 노랗게, 노랗게.
95.
기숙사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나’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카톡을 보니 ‘나’는 목요일에 조모임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셨다. 분명 그날 J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 그것이 아마 ‘내’가 J에게 싸움을 걸게 된 결정적인 트리거다. ‘나’는 J가 게임을 즐기고 과민성 방광염을 갖고 있다는 정보와, 앱을 통해 그가 몇 시간 동안 내리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네모 피시방에 갔다. 그리고 J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J에게 맞섰다. 비록 넘을 수 없는 체급 차이에 지긴 했지만 ‘나’는 맞섰다.
96.
중요한 사실. 이번에는 나도, 도망치지 않았다. 나도 한 방 먹였다.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죽 밀려온다.
97.
눈이 떠졌다. 핸드폰을 켜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2시. 다행히 일요일이지만 불행히 기말고사 하루 전이다.
“깨어 있어?”
나는 그 녀석을 부른다.
“나 기절하고 어떻게 됐냐?”
과장 조금 보태어 이야기를 풀어준다. 이야기를 듣던 그 녀석이 내게 묻는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할 거냐? 다시 내가 너 해?”
“번복해서 미안하지만, 나 좀 더 맞서보고 싶어.”
“그래 너 해라. 그게 맞지, 이제 와서 내가 무슨.”
그 녀석 무엇인가 하나 떠오르는 게 있나 보다.
“아, 마지막으로…”
98.
그는 나쁜 녀석이 아니었다. 그는 몸의 주도권에 욕심도 없었고, 그의 폭력성은 희석되어 있었다. 핸드폰 메모장을 보니 그가 나에게 남긴 메시지가 하나 있다. ‘시시해. 좀 더 맞서봐.’ 이는 내가 중학 시절 즐겨 읽은 만화 ‘우주 형제’에서 동생이 슬럼프에 빠진 형에게 해주는 말이다. 그는 늘 나와 함께였다. 똑같은 것을 보고 겪은, 하지만 조금 다른 것을 쌓아온 그는 다시 잠들었다. 거의 나오지 않았다.
99.
기말고사가 끝났고 이제는 방학이다. 할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평점
평점이 참담하다. 기말고사를 내가 보게 됐다. 그 녀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각 시험의 하루 전날에 공부하긴 했는데 하루로 해결될 분량이 아니었다. 또, C 언어 과제를 샀었는데, 표절 검사에 걸려 0점을 받았다. 정말 뿌린 대로 거뒀다.
전공 진입
알아보니 공학계열의 학생이 일반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과 말고도 융합 전공이라고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인 컬처앤테크놀로지과에 자기소개서를 써넣었다. 평점보다는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보고 뽑는단다. 콘텐츠 개발을 하고 싶은, 또 다양한 것들에 도전하고 싶은 내 마음을 자기소개서에 담았다.
자아실현
매슬로 5대 욕구의 맨 꼭대기 층을 차지하는 자아실현. 급하지 않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나가니까 닿는다. 그만큼 요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유튜브
게임 영상을 계속해서 올렸다. 이제는 게임 영상 말고도, 다른 영상도 찍어 올린다. 문득 떠오른 콘텐츠를 담은 영상을 올렸다. 다른 유명한 유튜버들조차 우리의 콘텐츠를 따라 할 정도로 대박이 났다. 유튜브를 시작할 때에는 생각도 못 했던 조회 수와 구독자 수를 찍었다.
아르바이트
구청에서 모집하는 대학생 행정 인턴에 지원해 근처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복싱
팡팡. 글로브로 샌드백을 칠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난다. 그 녀석의 마지막 부탁은 내가 복싱 도장에 다니는 것이다. 우리, 쌍둥이 인격 간에는, 시야뿐만 아니라 감각마저 공유가 가능하다. 샌드백을 치는 타격감은 우리가 함께 느낀다. 매일 한 시간. 이 시간만은 정말로 우리 둘이 하나다.
100.
아르바이트하러 도서관에 가야 하는데 너무 졸리다.
"너 또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지?"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그 녀석이 말을 건네왔다.
“이젠 아니야. 너도 알잖아?”
100+
패딩의 지퍼를 죽 올리고 아파트를 나선다. 어느새 길거리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이어폰에서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래 볼륨을 기분 내키는 대로 올리다가 청력이 손상될까봐 볼륨을 조금 줄인다. 손이 주머니 안에서 춤을 춘다. 멜로디에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 근본 없는 발걸음으로 눈길을 미끄러지듯 걷는다. 나는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아무렴 어때. 지금이 너무 신나는걸. 뜬금없이 짧은 문구가 하나 떠오른다. 나는 나지막이 그 문구를 입 밖으로 뱉어본다.
“미래는 지금이야."
| 민수 이야기 (4/5) (0) | 2020.1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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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왜곡병 -수능- (0) | 2020.12.01 |
2020. 12. 6. 09:31
61.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는 중 현수가 게임 메시지로 갑자기 ‘롤(게임) 유튜버를 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왔다. 어느 유명 BJ이자 유튜버를 동경하고, 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던 터라 좋다고 했다. 채널명을 미끼 TV로 정했다. 게임 녹화와 편집 프로그램을 알아보는 등, 근간을 다졌다.
62.
핸드폰을 하는데 그 녀석이 불쑥 들어왔다. 순순히 그에게 다시 내 몸을 내주었다. 머릿속이 유튜브로 꽉 차 있다.
63.
영상을 하나 편집해서 올렸다. 영상이 조회 수 25만을 찍는 꿈을 꿨다. 깨니까 허탈했다. 첫 영상은 아직 올리지도 않았는데.
64.
그에게 몸을 맡기면서 체격 또한 달라졌다. 근력 운동을 하는지 몸 구석구석에 근육이 붙었다.
65.
요즘 일주일에 두어 번 세 시간 정도 ‘세상'으로 나오고, 그때마다 게임을 하고 편집을 한다. 일주일에 영상을 세 개씩 올린다. 말로는 취미로 하는 거니까 구독자 수, 조회 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서서히 올라가는 구독자 수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66.
날짜를 계산해보니 기말고사까지 1주일이 채 안 남았다. 아무렴 어떠한가. 나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는걸.
67.
순조롭다. 유튜브 구독자 수가 어느덧 500을 넘겼다.
68.
이곳에서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한참 동안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69.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 녀석과 시야 공유를 시도한다. 처음에는 뿌옇고 탁한 이미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고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본다. 초점이 조금씩 맞기 시작하더니, 세상이 선명한 화질로 보이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 우중충하다. 이 녀석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70.
네모 피시방
내가 사는 C 기숙사랑 거리가 멀어 접근성이 떨어진다. 주로 B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이 이용하는 피시방. 이 녀석 피시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성큼성큼 오른다. 의도를 모르겠다. 이 녀석 게임도 했던가?
71.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에 로그인한다. 이용 시간이 3시간 정도 남아있다. 게임은 실행시켜 놓지도 않고, 시선을 슬쩍슬쩍 화장실 쪽으로 흘긴다. 이상한 녀석.
72.
한참 동안 멀뚱히 앉아있다. 지겹지도 않나. 사용 시간이 30분 남았다는 음성 메시지가 울린다. 그때, 어마어마한 덩치의 남자가 헐레벌떡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다. 저 정도 덩치는 흔치 않은데.
73.
최준우
대학교에 와서 12명 단위로 조를 편성해줬다. 새내기들이 대학의 첫 1년을 함께하며 적응에 도움이 되라는 좋은 취지다. 그 중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띄는 녀석이 있었다. 최준우. 키 190cm에 살집이 있어 덩치가 곰 같은 녀석. 자만이 얼굴과 언행에 꾸덕꾸덕 묻어 나는 녀석, 내 인격을 자근자근 씹어 댄 녀석. 앞으로 그를 J라고 부르겠다.
74.
조모임에서 대표로 밥값을 계산하게 되면 하루 안에 밥값을 돌려받은 적이 없다. 꼭 혼자만 늦는다. 번거롭게 서너 번 쪼아 대야, ‘아 맞다’ 하면서 잊고 있던 척 뒤늦게 계좌로 돈을 보내준다.
75.
학기 초 J의 생일이라 ‘생일 축하하고, 좋은 하루 보내’라는 형식적인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건만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76.
J를 포함해 같은 반 다섯이서 팀 게임을 하는데, 자기가 못한 것은 괜찮고 남이 실수한 것은 안 괜찮다. J는 게임 내내 욕을 내뱉더니 게임을 지고 나서 대뜸 내 멱살을 잡았다. J의 정신이 나갔나 싶었다. 순간 화가 확 나서 그의 코에 주먹을 꽂아버릴까 했지만 눌려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주변의 술렁이는 분위기에 그도 아차 싶었던지 멱살을 슬며시 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판을 돌린다. 나는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래, 여기까지.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니까. 우연히 같이 듣는 수업 하나. 그때 외에는 거의 마주치지 않을 터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77.
X와 같이 듣는 수업에서 조별 과제를 하라고 무작위로 조를 편성해줬다. 좋다. 그런데 어째서 이름 ‘주민수’와 ‘최준우’가 4조 명단에 사이좋게 자리하는가. J는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에서 자기 의견을 내지도 않으면서 내 의견은 사소한 거로 트집 잡거나 아예 묵살했다. 결국, 마감일이 다 되어가자, 그의 머리에서 나온 별 시답지 않은 주제로 과제를 진행했다. J는 발표를 맡는다며 발표 전까지 아무것도 안 해놓고, 발표 때는 남이 써준 대본을 코에 붙이고 읽었다. 그대로 말아먹었다. 그래 놓고 내 탓이라며 정치를 했다. 할 말이 더 있지만 별로 꺼내고 싶지 않다.
78.
과민성 방광염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것 하나는 말해 둬야겠다. J는 과민성 방광염을 앓고 있다. 과민성 방광염은 방광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자주 수축하여 급하게 소변이 자주 마려울 뿐만 아니라 잘 참지 못하고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을 수반한다.
79.
J가 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보자마자 ‘내’가(현재 나의 몸을 지배하는 인격과 나의 몸을 통칭하여) 화장실로 뛴다. 아니 뭐 어쩌려고?
80.
시야가 흐려지려 한다. 정신을 다잡으며 상황을 뚜렷하게 보려고 애를 썼다.
| 민수 이야기 (5/5) (0) | 2020.12.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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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왜곡병 -수능- (0) | 2020.12.01 |
2020. 12. 6. 09:29
41.
나는 필사적으로 온라인상에서 의존할 만한 사람을 찾았다. 오프라인에서는 더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정신병인 듯한 음울한 나의 현 상황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42.
공부 앱, 랜덤 채팅, 익명 커뮤니티를 가리지 않았다. 나를 공부시켜주거나 내 일상을 지켜봐 줄, 감시해 줄 만한 사람을 찾았다.
43.
끝끝내 의존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한 나는,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꺼버리고 누웠다.
시시껄렁해. 마침내, 내 세계는 마지막 빛깔을 잃었다.
44.
길고 긴 잠이었다. 이렇게 깊은 잠은 오랜만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
45.
"누구야?"
방에는 분명 나 혼자일 터인데. 나는 방어적으로 되어 그 목소리를 경계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외부적으로 들리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46.
"너 계속 찾고 있었잖아. 의존할 사람. 네가 나를 만든 거야."
의존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한 내가 또 다른 인격을 발현시켰단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건 이 녀석이 나의 제 2인격.
47.
3일 만에 샤워를 하고 기숙사 방에서 나가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었다. 혀랑 입천장을 데어가며 뜨거운 줄도 모르고 순대국밥을 허겁지겁 입에 떠 넣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런 나를 그 녀석이 괜찮다며 다독여줬다.
48.
그 녀석이 나에게 매뉴얼을 짜주었다. 수면시간, 식사 시간이 딱딱 정해져 있었다. 계획이 빡빡했다. 그 녀석을 믿고 1주간 철저하게 메뉴얼을 따랐다. 나름 여유시간도 주어지고 그랬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충실감을 맛봤다.
49.
그 녀석이 나타난 이후, 누가 지켜봐 주는 느낌이 들어 심리적 안정감을 회복했다. 혼자 도서관도 가고, 농구 동아리도 다시 나갔다. 독방은 더 이상 나를 가두지 못했다.
50.
그 녀석도 잠을 자나 보다. 내가 쉴 때 그리고 가끔은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51.
그 녀석이 나타난 지 일주일이 되었다. 그가 다음 일주일의 매뉴얼을 짜주고 있다. 전주보다 많아진 그 양에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내 안에서 도망치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방출된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발악을 해댄다.
52.
충실감은 잠깐이었다. 즉각 즉각 나오는 결과와 보상이 없다 보니 또다시 재미가 없다. 시시해졌다. 무엇보다 게임을 못 한지 너무 오래됐다.
53.
자아실현은 매슬로 5대 욕구의 맨 꼭대기 층을 차지한다. 손을 높게 뻗어도, 발돋음 해도, 껑충껑충 뛰어도 닿지 않는다. 나에게는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한다. 시간은 적고 할 것은 많다. 자아실현을 위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여유가 없다. 그와 일주일을 보내면서 ‘여유를 지워야 겨우 사는 건가’하는 생각이 든다.
54.
또 도망쳐버렸다.
그 녀석이 잠든 새를 타 석영의 전화를 받고 게임을 하러 피시방에 왔다. 같이 게임을 하는데 재미가 없었다. 두 판 하고 나왔다.
55.
피시방에 간 건을 알게 된 그 녀석이 발끈했다. 나는 나 몰라라 하는 자세를 취했다. 더나아가, 그 녀석에게 ‘나의 몸의 주 인격이 되어 줄 수 없냐’고 물었다. 그 녀석은 한심하다는 투로 ‘정말 그래야 되겠냐’고 되묻는다.
56.
마지막으로 그에게 부모님에게 받은 것들을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우리'의 부모이니까. 몸과 인생의 양도가 이뤄졌다.
57.
암전. 이곳은 깜깜하다. 아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진 나는 독방에서 누리던 자유보다 더 자유로운 자유를 누린다. 이곳에서는 의식의 끔과 킴이 자유롭다. 의식을 끄고 있다가 사유를 하거나, 그 녀석이 무엇을 하는지 슬쩍슬쩍 보며 시간을 보냈다. 정확히는 그 녀석이 무엇을 하는지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는 것을 같이 본다(시야를 공유한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58.
그 녀석이 무엇을 하는지는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초점이 맞지를 않는다.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쓴 느낌이다.
59.
그는 가끔 나를 불러내어 여유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동시에 그는 자기의 의식을 차단해 놓고 나름의 휴식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피시방에 갔다.
60.
갑자기 이 녀석이 하루 동안 나에게 몸을 맡겼다. 하루 정도 쉬고 싶단다. 냉큼 피시방에 달려갔다.
| 민수 이야기 (5/5) (0) | 2020.1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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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왜곡병 -수능- (0) | 2020.12.01 |
2020. 12. 6. 09:27
21.
‘열심히 해보자’는 다짐은 C 언어 과제를 마주하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렸다.
22.
화요일 오전수업, 일반 물리. 시간이 너무 안 간다. 교수의 사각지대에서 만화를 봤다.
23.
요즘 부쩍 피곤하다. 3시에 있는 미적 수업, 빠진 적 한번 없었는데 낮잠 자느라 안 갔다. '하루쯤은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24.
C 언어 과제
미루고 미뤘더니 이틀 남았다. 스스로 하는 건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지난 두 번의 과제는 안하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대학교 익명 커뮤니티에서 돈 주고 코드를 샀다.
25.
교양과목 과제
미루다가 얼렁뚱땅했다. 평가 기준에서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은데, 뭐 상관없겠지.
26.
기숙사 방이 점점 더 난장판이 돼간다. 한 사람의 집 상태는 그의 정신 상태를 표방한다는데, 정말 맞는 말 같다. 방의 한구석이 쓰레기로 가득 찼고 각종 유인물은 낱장이 되어 방 곳곳에 흩어져 있다. 요즘 옷가지들이 침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웅크리고 잔다.
27.
오후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에 돌아가는 길. 석영이한테 같이 게임을 하자고 할 요량으로
전화를 건다.
"야 뭐하냐"
"드럼 치러 간다."
"그것이 네 자아실현의 수단이냐?"
"그래 임마, 너도 자아실현 좀 해"
"난 다이아(게임의 등급)나 가야겠다. 게임이 내 자아실현인가 봐"
오늘도 한참 동안 롤(게임)을 했다.
28.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기말고사까지 단 4주 남았다. 중간고사 때보다도 더 엇나가는 중이다.
29.
오후 8시, 갑자기 졸렸다. 자고 일어나니 새벽 3시다. 오늘 마감인 과제가 있다.
‘한번 해보자!’하며 찬물 샤워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5분 정도 과제를 하다 보니 심심해졌다. 심심하면 안 되는데 심심했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을 하다가, 나른해져서 눈을 감았다. 아침 10시까지 내리 잤다. 겨우 일어나 수업에 갔다.
30.
오전수업을 이틀 연속으로 안 갔다. 일어날 수 있었는데 그냥 12시간씩 자버렸다. 그런데 또 졸리다.
31.
정말 위태롭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실감이 안 난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들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상이 간다. 뻔히 보인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이게 정말 위험한 거야’라 생각했다.
32.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불안해서 미치겠다. 그럼 과제든 뭐든 좋으니 뭐라도 하면 좋지 않겠냐고? 너무 막막하다. 할 것이 너무 밀려 있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두통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33.
고등학교 때는 매뉴얼이 있었다. 다니라는 학원에서 주어진 숙제만 하면 점수가 어느정도 나왔다. 지금은 매뉴얼도, 나를 지켜보는 사람도 없다.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34.
정신을 못 차린다. 해야 할 것이 백이면 하나를 해놓고 각종 익명 커뮤니티, SNS를 순회해가며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 댄다.
35.
요새 한번에 세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 불안해서 자꾸 깬다.
36.
4인 4실. 독방이라 개인공간이 있다. 한없이 자유로운 공간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방에 갇혀 버리는 것을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금, 토, 일 삼 일간 기숙사 방을 나가지 않았다.
37.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38.
나 좀 공부시켜줘
39.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
40.
의존하고 싶다. 자꾸 의존할 사람을 찾게 된다. 내 인생과 책임을 양도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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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6. 09:23
나는 내 운명을 지배한다!
자기계발서에서 자기확신적인 말을 자주 입 밖으로 꺼내라길래, 내가 내 눈앞의, 나만큼이나 이상한 친구 앞에서 툭 내뱉은 말.
그는 내가 운명을 지배하는 것도 운명이라고 했다.
머리가 띵했다. 말장난으로도, 심오하게도 해석될 수 있는 그의 말.
한편, 훈련소에서 "미래는 정해져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대화 주제에 올랐다. 나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한번뿐일것이고, 시간은 일방향으로 흐르므로 이에 대한 논증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확인할 길이 도통 없는 것 같아서.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그렇다면 내가 미래를 바꿔보겠어! 하면서 과격하게 몸부림치는 것도 정해진 미래의 범주 안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생을, 운명으로 설명해도 좋고 우연으로 설명해도 좋으며, 둘을 섞어가며 설명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운명과 우연, 어느 쪽이라도 좋지만 나는 대부분의 것들을 우연으로 설명하고 싶다. 운명은, 무엇인가 딱딱 정해져 있을 것 같아서 딱딱한 어감이 들기에, 우연론자를 자처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운명적인 만남, 사건 같은 것은 훌륭할정도로 로맨틱한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정신과 육체에 지속적이거나 치명적인 해를 가하지 않는 한, 나와 마주하는, 살짝이라도 스쳐가는 수많은 우연들을 기꺼이 끌어안아 줄 것 같다. 지나친 해를 주는 것들도 나중가서는 포용할 수 있기를. 이것이 우연론자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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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5. 21:21
(필자가 경험한 대학 새내기 기숙사 생활을 바탕으로 한 대학생 방황 성장 소설입니다)
0.
"너 또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지?"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그 녀석이 말을 건네 왔다.
1.
통금 전에 기숙사에 들어가려고 피시방에서 나오는데 바람이 찼다.
"이게 맞는 거냐 주민수?"
나는 점퍼의 지퍼를 죽 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소리는 안 들렸겠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허공에 입술을 빠끔거리는 꼴은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2.
스무 살 대학생인 나, 주민수의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다'로 요약된다. 하나 있는 오전 수업을 대강 때운 뒤, 기숙사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기숙사 통금 직전까지 게임을 했다. 그리고 기숙사 침대에서 뒹굴며 유튜브를 보는 중이다.
3.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이끌려 한 영상에 도달했다. 한 유명 BJ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찔렀다.
“목표 있을 거 아니야 목표. 자아실현 해야지.”
언젠가부터 나가지 않고 있는 농구 동아리, 복싱 도장 등이 머릿속을 휙휙 지나쳤다.
4.
요즘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일단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본다. 마감일 전에는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닌 느낌이 들어 여유가 있다.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게임을 한다. 마감일이 되어서야 잠시나마 현실을 깨닫는다. 몇 시간 안으로 뚝딱 되는 일이면 대충 해결하고, 안 되는 일이면 그냥 없었던 일처럼 흘려버린다. 도망쳐버린다.
5.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고 대학도 같이 들어온 친구가 있다. 혼자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성중이었다. 게임 두 판을 같이 했다. 난 더 할 생각이었는데 성중이가 나를 피시방에서 끌고 나와, 싸고 맛있다는 분식점에 데려갔다. 그러고는 떡볶이 2인분에 튀김 2인분을 주문하고, 어묵 국물을 떠다 줬다. 종이컵 너머로 전해지는 어묵 국물의 열기는 따끈했다. 먹으면서 대학교에서 그간 어땠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중이는 충실하게 학점도 잘 받으면서 잘 놀고 다니는 모양이다. 오늘 아는 체해준 게 고마워 내가 계산했다.
6.
성중이랑 기숙사에 돌아가는데 성중이가 도서관에 가잔다. 공부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자기계발서를 몇 권 꺼내 성중이 옆에 앉았다. 한두 쪽 읽으니 피곤해졌다.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책에 집중하는 척 노래를 들으며 성중이가 공부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7.
기다리다가, 심심해져서 플래너에 내일의 계획을 세웠다. 오전 수업 하나 있는 화요일. 알뜰한 하루를 보내겠다는 다짐을 플래너에 기록했다. 또, 빼곡하게 계획을 짰다. 흘낏 보니 성중이가 짐을 싼다. 나도 플래너를 가방에 넣고 일어선다.
8.
다시 기숙사. 핸드폰을 보다 늦게 잠들어 놓고, 그대로 오전 수업에 결석해버렸다. 사실 알람에 깨긴 했는데 ‘어차피 가도 못 알아들을 텐데 간다고 뭐가 바뀌어?’하면서 그대로 다시 잤다. 오늘 하루가 끝날 무렵 어제 세웠던 무수한 계획들이 떠올랐다. 계획 이수율 0%. 맞다. 이게 나다. 하하하.
9.
중간고사 1주일 전
그래도 일주일이면 넉넉하게 남았다고 생각했다. 안심이 됐다. 피시방에 들어갔다.
10.
중간고사 3일 전
오늘부터 게임은 일절 금지다. 한 과목당 20시간 공부할 시간이 남아있다. 이 시간 잘만 쓴다면 B+ 평점까지 무리 없다.
11.
중간고사 전날
피시방은 안 갔지만, 공부도 안 했다. 재밌는 영상, 재밌는 만화가 많았다. 낄낄대면서 보고 싶은 것 다 봤다. 지금 돌아보면 억지로 낄낄댔던 것 같다.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12.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다.
미분적분학2.
적어도 수업 시간에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과목. 평균 60점에 내 점수는 40점. 쉬운 문제에서 실수가 있어 살짝 아쉽다.
일반물리 2
문제의 화요일 오전 과목. 학기 초에는 수업을 따라가다가 도중에 낙오돼 버렸다.
평균 50점에 25점. 평소 귀찮음에 출석도 과제도 안 했다. 이대로면 C 평점도 과분하다.
C언어
비중이 어느 정도 큰 과제를 몇 번이나 안 했다. 한편 벼락치기에 실패해서 평균점에 한참 미달이다. 숙연해진다.
13.
중간고사 결과야 어쨌든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본가로 돌아왔다. 유행하는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밥도 먹었다. 가볍게 술도 한잔 걸쳤다.
14.
현수
십자인대 때문에 신체검사 5급 판정을 받았다. 그 때문에 2년을 벌었다며 별 고민 없이 ‘하고 싶은 것을 찾을 거야!’ 하며 대학교를 휴학했다. 요즘에 알바를 구했단다.
착실한 녀석.
15.
형훈
1등급 인생. 부모님, 인간관계, 대학 등 모든 게 1등급이다. 이 녀석은 불안 요소란 게 하나도 없단다. 취미로 C언어를 공부하는 중이다. 심지어 국가유공자로 4급 판정.
완벽한 녀석.
16.
석영
0.1% 금수저다. 하고 싶은 것 다 즐기고 갖고 싶은 것 다 누리는 중. 요즘은 제과 제빵이랑 드럼이 그렇게나 재밌단다.
부러운 녀석.
17.
친구들과 헤어지자마자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다. 어쩐지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쉽더라니.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밤길을 걷는데 내 처지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평점 관리를 해야 한다. 당장은 이것밖에 없다.
18.
이번 학기 평점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하나, 기숙사. 우리 학교 기숙사는 평점 순으로 뽑는다. 통학하기에는 좀 멀고 자취는 비용이 좀 세다. 둘, 전공 진입. 1학년 때의 평점은 전공 진입과 관련된다. 원하는 과로 진입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평점을 받아둬야 한다. 생각도 않던 과에 떨어지는 건 좀 싫다. 할 게 확실히 정해졌다.
19.
‘아직 바꿀 수 있어. 만회할 수 있어.’
취해서 그런지 행복회로가 쌩쌩 돈다. 나는 열심히 할 거고, 생각하는 대로 잘 풀릴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내 방 내 침대에서 푹 잤다.
20.
지하철과 버스를 환승해가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답답했다. ‘할 수 있을까?’라기보단, ‘내가 할까?’ 하는 걱정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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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5. 20:20